“보통 생각하는 ‘노인잔치’가 아니었어요. 절대로 뒷방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새로운 세대’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7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던 지난 27일. LA 다운타운 인근의 굿 사마리탄 병원 앞은 이른 아침부터 붐볐다. 나이 지긋한, 그러나 환자도 보호자도 아닌 ‘멋쟁이’ 남녀가 몰려들었다. 오전 8시부터 병원 강당에서 진행된 시니어 모델 오디션 참가자들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한미메디컬그룹을 대표해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정수헌 내과전문의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오디션 장의 열기가 대~단 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어 모델 하려는 분이 얼마나 될까? 쑥스러워서 쭈뼛쭈뼛하지는 않을까?” 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50대부터 90대에 이르는 참가자들은 당당하고 진지했다.

“보통 생각하는 ‘노인잔치’가 아니었어요. 절대로 뒷방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새로운 세대’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한미메디컬그룹(KAMG, 회장 박태호)이 실버세대를 겨냥해 특별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노년은 있어도, 노인은 없다”는 슬로건으로 액티브 시니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 첫 행사로 지난 10월과 4월에 연 실버 토크콘서트가 대성황을 이뤘고, 오는 9월에 열릴 실버 패션쇼 역시 오디션 과정에서부터 관심이 뜨겁다. 노년의 가장 큰 적은 우울증.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주위 사람들과 교류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들이 토크 쇼와 패션쇼를 기획하는 배경이다. 모델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주최 측은 여러 번 놀랐다고 한다. 우선 놀라기는 엄청나게 밀려든 지원신청. 지원자가 380명에 달했다. 멀리 한국에서 “비행기 값 상관없다”며 신청하는 지원자가 있는가 하면, 한인 아내가 알려줬다며 타인종 신사들도 지원했다. 90대 할머니들이 지원했고, 태권도 관장 등 한인사회에서 꽤 알려진 지원자들도 여럿 있었다. 지원자격을 ‘55세 이상’으로 한 것은 주최 측의 ‘실수’였다. 요즘 50대는 ‘시니어 모델’ 하기에 너무 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이 많은 지원자들을 우선으로 60여명이 선발되고, 미모 빼어난 50대 지원자들은 억울하게도 불합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무엇보다 주최 측을 놀라게 한 것은 지원자들의 열정. 모두들 오디션 참가 자체로 신이 나있었다.

“어릴 적 꿈이 연예인이었다. 시집가서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다보니 어느새 70대가 되었다. 이제라도 ‘나’를 찾고 싶다.” “60대 중반에 은퇴하고 나니 도무지 가슴 뛰는 일이 없더라. 이런 기회가 있어서 너무나 좋다.” “지금 나이에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다.” “모델선발 광고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더라. 신청하고 준비하는 내내 즐거웠다.” … 오디션은 축제였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이분들에게 어떤 갈구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꼈다고 정수헌 전문의는 말했다.
노년을 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65세를 노년의 시작으로 보았지만 지금의 65세는 이전 세대의 65세와 다르다. 훨씬 젊고 건강하다. 대표적 고령사회인 일본은 75세를 노년의 기준선으로 바꾸었다. 65~74세는 노년 이전시기로 분류된다.
노년이지만 노인이 아닌 이 연령층의 특징은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하다는 것. 이런 부류의 새로운 실버세대가 한인사회에서도 늘고 있다. 70년대 80년대에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이민 1세대들이다. 성인자녀 따라 미국에 와서 웰페어에 의존해 살았던 부모세대와 달리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젊다. 이전 세대와 비교하면 나이에 0.7을 곱하는 것이 새로운 나이 계산법이다. 70살이면 옛날 기준으로 49세가 되는 것이다.

이 젊은 노년의 넘치는 활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분출구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 공통의 숙제이다.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시장. 어디에 돈주머니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대공황 이후 미 국내소비자 지출 성장의 절반은 55세 이상 연령층의 소비 덕분으로 분석되고 있다. 인구도 많고 돈도 많은 것이 실버세대이다.
눈치 빠른 시장이 몇 년 전 만들어낸 것이 시니어 모델이다. 유명 패션쇼마다 이제는 시니어 모델들이 등장한다. 2015년 79세에 혜성 같이 등장한 중국남성 모델 왕데슌이 인기절정이고, 한국에서도 60대, 70대 모델들이 인생 후반에 생각지도 못한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KAMG의 패션쇼는 이같은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건강 잃고 몸져누울 그날이 언젠가는 닥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5년, 10년 혹은 20년 인류사상 가장 젊은 지금의 실버세대는 생애 중 가장 안락한 날들을 누릴 수 있다. 돈에도, 시간에도 구속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금쪽같은 시간이다. 모델도, 작가도, 화가도 될 수 있다. 왜 도전하지 않는가.

출처 : 한국일보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23 Aug 2019
기사 원문 : https://www.koreatimes.net/ArticleViewer/Article/121545